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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씨

비정제인 2020. 8. 7. 01:09

'김지은입니다' 라는 책을 읽었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그냥 포털에 올라오던 기사들, 그리고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 정도.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베스트) 댓글들의 내용이 나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안희정 씨에 대해서는 원체 별 관심이 없었던 지라, 사실 나의 견해랄 것도 딱히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간에 김지은씨의 경우가 미투의 취지에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최근에 나오는 사건들, 판결들, 기사들, 기사들의 댓글들 등의 내용으로 비추어보건대,

나는 내가 성 인지 감수성이 그렇게 높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의 말이나 행동들로 인하여 어떤 식으로든 (성적으로) 불편하게 느낀 여성들이 분명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들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믿고 싶다.

('의도가 없었다'는 이 말 자체가 상당히 무책임하고 비열하게 들릴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난 아마도 최근에 논의되는 방식으로의 성 인지 감수성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성적인 것을 떠나서, 그저 인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 의하면, 안희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강자가 권력을 사용하여 약자를 괴롭힌다든지 착취한다든지 하는 것은 매우 싫어한다.

남이 그러든 내가 그러든.

사람으로서 차마 사람에게 어쩌지 못하는, 불인인지심, 그것에 나는 큰 관심이 있고,

성 인지 감수성은 적을 지언정, 불인인지심은 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내 생각에 (즉 내 기준에 맞게) 인간을 인간답게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기만 하면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해오곤 했는데,

그런 생각으로 내가 누군가를 대했을 때,

요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성적으로 문제가 있을 행동이나 말들이,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거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의 여부는 ("저놈은 성 인지 감수성이 낮군, 쓰레기같은 놈")

뭐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secondary인것 같고,

더 중요한 것은, 나와 interact하는/했던 당사자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상처를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당사자라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방향이나 정도의 성 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상처 주는 일을 피하려면 최근에 받아들여지는 성 인지 감수성을 내가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막연히 있었다.

그렇다고 책이나 이런 것을 열심히 찾아본 것도 아니지만.

 

그런 맥락도 있었고,

그냥 기사나 댓글들에 나오는 거 말고,

피해자 본인의 말들을 온전히 한 번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가해자 측의 입장은 기사에서 충분히 나온 것 같고, 댓글들도 모두 가해자 '편'에 해당했으니,

반대편 말도 충분히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입장이든 변명이든 모르던 팩트든, 느끼는 감정이든.

 

또한 이런 성 사건과는 별개로,

측은지심의 측면에서,

나는 종종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들어보고 싶어하고,

들어주는 행위 자체 혹은 좀 더 적극적인 어떤 행동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거나 실제 도와주는 일에,

꽤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냥 어릴 때 부터, 나는 약자의 얘기를 듣고 약자 편에 서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뭐 약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내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서거나 그랬던 적도 딱히 없다.

여하간 나만 특별히 착하다기보다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이 나도 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여하간 피해자나 약자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에 그냥 일반적 관심이 있기도 했다.

 

 

하여 이 책을 사서 읽었다. 

결론적으로는, 사길 잘 했고, 읽기를 잘한 것 같다.

 

삶에서 이런 절박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얘기를 읽다보면, 참 돈이라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든다.

아 참, 김지은 씨는 사실 금전 사정이 좋지 않아서 돈과 수입 때문에 생존과 직결하여 어려움을 많이 겪기는 했는데,

우선 나는 나와 상관 없는 제 3자의 상황을 읽기만 하면서, 내 인생만 (이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돈이 인생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좀 정리해보면, 일반적으로, 돈은 인생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재산 혹은 수입이 많은 것이랑 인생의 행복 및 의미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행복 및 의미를 얘기하기 전에, 재산이나 수입이 너무 없어서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면 물론,

돈이 상당히 중요한 factor가 될 것이다. 먹고 살 정도는 있어야겠고,

그 다음에서야 이게 내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하여간 나는 일반론을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인생은 ~~다", "인생에서 중요한건 ~~다", "인생에서 ~~는 안 중요하다."

이런 거 말고.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에 대해서밖에는 없다.

내 생각에 내 인생에서 중요한건 뭐지?

어릴 때는 이 질문의 답에 돈이 전혀 없었는데,

그리고 최근에는 쏠쏠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부수입이 있다면 살 만하지 않겠는가 생각도 했는데,

글쎄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을 보면, 돈이 다 뭔가 싶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그런 힘든 일이 나에게 있었다고 가정해보면,

아마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어떻게 좋은 사람들에게 잘 치유받을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을 (다양한 의미에서) 없던 일로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재산이나 수입이 많으면 위의 사항들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돈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도 읽었는데 (다른 책), 여기 나오는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그냥 공권력에 의해서 갑자기 살인자 누명을 쓴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돈 억만금이 의미가 있을까?

누명 벗는게, 마음 힘들지 않고 일상을 즐겁고 편안하게 사는게, 그런게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다시 김지은씨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래, 책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의 진심이 정말 잘 느껴졌다 나는.

글도 잘 쓴다. 원래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했던가? 전공이 문학이었다고 했던가? 기억이 안나네.

하여간, 자기의 지나간 상황들, 자기가 느꼈던 바들을, 진정성 있게 잘 글로 표현한 것 같다.

문득 생각하면 무서운 점도 있는데, 그건 또 역설적으로, 이 사람이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생기는 무서운 점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잘 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난 책을 읽으면서, 그래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공감이 됐는데,

만약 이게 허구라면?

아,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안희정 측의 주장을 이 정도로 세세하게 읽어보거나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글쎄 이 책은 심정적으로 신뢰가 많이 간다고 해야겠다.

물론, 재판이라는 것이 그런 것만 가지고 행해지는 것은 아니고, 직접 물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뭐 법이랑은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일반 구경꾼으로 봤을 때는,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내 마음도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읽은 후 궁금한 점들은 많이 있다.

그래서, 김지은 씨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일상을, 잘 살고 있을까?

나는 과연,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 책을 한 권 사고, 아무도 보지 않을 이런 글이라도 쓰는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런게 이 글은 과연 그녀에게 도움이 되긴 되는 글인가? negative만 아니면 좋으련만.)

그 이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만나서 맛있는 밥을 사주면서 얘기도 들어주고. 힘이 되는 말을 건네고.

그럴 수가 있을까?

(그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럼으로써 내가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에 닿다보면, 그래 역시, 난 못하겠지 싶다.

현실적으로도 (연락처도 모르고) 어렵겠지만,

그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 같다.

왜냐면, 이미 살면서 성 인지 감수성 없는 짓을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아서,

애초에 자격이 미달인 것 같다.

성 관련 피해자를 돕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주제넘는 짓인 것 같다.

(예컨대 안희정이 다른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다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누구에게?), 간접적으로 돕는 일밖에는 없을 것 같다.

책 한권 더 사기라도 해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다든지 등으로.

 

아, 난 대체 어디까지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된걸까.

내가 할 자격이 있는 일이란게, 있기는 할까?

 

뭘 하고 살아야 되지?

그냥, 이런 거 포기하고, 빌런으로 살아야 할까?

 

아, 그건 갑자기 내 얘기였고.

 

궁금한 점 중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다.

책에 의하면, 가해자 측에서는 조직적으로 댓글도 달고 하는 등 여론을 만드는 데 열심인 것으로 보인다.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예컨대 새벽에 부부침실에 갔다는 둥),

그러한 거짓 정보를 토대로 프레임을 짜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형성하려는 등.

그런데, 피해자 편의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댓글 활동으로 맞설 생각은 하지 않는가?

아니, 하긴 하는데, 내가 모르는건가?

댓글로 누군가 거짓말을 했을 때, 댓글에 댓글로 반박을 열심히 달다보면,

또한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댓글도 좀 열심히 달다보면,

지금처럼 댓글여론이 한 쪽으로 기울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거짓말이 판을 치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활동가나 관련 단체들에서는,

댓글 대응팀,

이런게 없나?

아니면, again, 있으며 내가 말한 종류의 활동도 하는데, 내가 몰랐던 것일까?

글쎄, 모르겠다, 막상 하다보면, 그러니까 옹호하는 댓글 혹은 대댓글을 달면,

뭇 사람들은 거기다 대고 '알바 출동이다' 이런 소리나 하겠지?

아니, 그런데 가해자 측 댓글들도 조직적으로 다는 게 많다는데?

아, 공평한 시대는, 치사하지 않은 시대는, 올 것인가?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면, 답도 안 나오고 피곤해지는 것 같다.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쓰다보니,

쓰면 쓸수록 무기력해지는 것도 같다.

 

김지은씨처럼 처절하게 당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도 어느 면으로는 당하면서 살기도 했고 지금도 당하면서 사는 측면도 있고,

여하간 나도 그 무기력, 학습된 무기력, 그런 말은 조금 알 것도 같다.

 

이런 무기력, 혹은 학습된 무기력은,

'스토너'에서 스토너 교수도 가정에서 겪은 바 있다.

 

사람은 그렇게 당하다 보면, 기준을 자체적으로 낮게 잡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큰 기대는 내려놓게 되고 (인생의 의미, 정당성, 공정한 상황 등),

그냥 내 삶과 주변 상황이 뭐가 어떻게 굴러가든 간에,

일상에서 가끔 소중한 순간이 하나씩 있을 때마다,

그냥 그런 순간들이 있으니 인생은 그래도 살 만 한 거 아닌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닌 거 아닌가 하고,

그냥 그렇게 자위하게 되는 것 같다.

 

신나는 삶.

동경한다. 부럽다.

아, 신나게 사는 사람들.